우리의 야생 소녀
여성의 존재를 소환하고, 인식하고, 용기 내게 만드는 시들이 인상적이었다.어떤 시는 전사가 되어 투쟁하고 싶게 하지만, 어떤 시들은 사라지고 마는 것들에 대해 깊은 허무를 느끼게 한다. 시집 뒤에 평론가는 자궁과 무덤을 오가며 재탄생을 꿈꾸는 시라고 했지만, 그것은 평론가의 말일뿐, 한 명의 독자로서는 삶에 깊은 회의를 갖게 만든다.이렇게 스러지고 사라지고 앗아가는 세상에, 그런 투쟁은 무슨 소용이냐는.그러다가 마지막 즈음 <초상>이라는 시에서는 섬뜩함을 느낀다. 고인의 살과 뼈와 뇌로 만든 음식을 내어주는 상주가 화자가 된 시. 숱한 역사의 순간들에서 아니, 역사도 아니고 그냥 일상인 줄 알았던 하루 중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그들은 희생양이 되고 열사가 되고 도화선이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죽은 자들은 누군가에겐 팔아 먹힌다. 언론에서, SNS에서, 참칭하는 자들에 의해서. 입으로만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들, 입으로만 애도하는 사람들에게 <초상>은 섬뜩할 정도로 그 죽음을 각인시킨다.어찌 되었든 시집을 덮고 허무하고 삶을 회의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갖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때문에, 나는 누구인지 세계와 사물과 스스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어느 지점에 존재하는지 묻게 된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화장하지 않는 여자사냥꾼이 나타났다!
윤진화의 시는 화장하지 않는다. 윤진화 시의 화자에게서 스스로를 사랑하려는 열정이나 자신 안에서 진귀한 이미지들을 꽃피워내려는 의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녀들은 나르시시즘적인 즐거움 대신 어떤 공격성과 예기치 않은 고통에 민감하다. 윤진화의 시는 죽음 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있어 삶의 예찬인 나르시시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겠다. 덧붙여 시인이 실제로 겪은 타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엿듣고 싶은 유혹마저도 느끼게 된다. 이미지들의 장식도 증식도 없는, 화장하지 않는 그녀의 거울을 들여다보자.